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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의 명예보호인가, 시민의 언론피해구제인가?

by PCMR 2020. 12. 8.

공직자의 명예보호인가, 시민의 언론피해구제인가?

 

언론사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여론은 찬성이 압도적이다. 미디어오늘 여론조사에서는 찬성이 81%로 나타났다. “악의적으로 허위보도를 하면 언론사가 망하는 수준의 배상을 묻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최강욱 의원)는 논리에 다수가 공감한 결과로 보인다. 찬성측은 이미 징벌적 손배제를 운영하는 미국을 모델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미국의 징벌적 배상제는 언론사를 처벌하기 훨씬 까다로운 제도이다. 특히 소송을 낸 사람이 공직자이고, 대상이 공적 사안이라면 징벌적 배상은 고사하고 명예훼손을 인정받기도 어렵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국의 명예훼손법은 엉터리이자 수치라 비난하며 어떻게든 이 법을 바꿔보려 안간힘을 썼던 이유이다. 이에 비춰 한국에서 징벌적 손배제가 조국 사태를 계기로 추진된 건 역설적이다.

 

미국에서는 왜 공직자가 승소하기 힘들까?

 

공직자 명예훼손에서 언론에 대한 면책범위가 우리보다 현저히 넓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사실을 보도하면 아예 불법행위가 되지 않는다. 사실을 보도해도 형사법정에 설 수 있는 한국과 다르다.

 

미국은 소송의 원고가 공인이나 공직자일 경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실제의 악의’(actual malice)라는 법리를 적용한다. 실제의 악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악의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규칙이다. 통상 악의는 나쁜 의도나 해악을 끼칠 욕심을 의미한다. 이런 악의의 개념 하에서는 언론사가 아무리 진실로 여길 만한 믿음을 가졌어도 보도의 동기가 나쁘면 처벌한다. 그러나 실제의 악의에서는 증오, 악의, 적대감정에 기초하여 처벌하지 않는다.

 

징벌적 손해배상에서는 언론사가 허위임을 알면서도 보도했거나, 혹은 진실성에 관하여 중대한 의심을 가지고도 무시했다는 사실을 원고, 즉 공직자가 증명해야 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통상의 민사사건에서 요구되는 비교우위(객관적 증거)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로 허위의 인식(knowing falsity)이나 무모한 무시(reckless disregard)를 입증해야만 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일단 허위면 위법이 되고, 진실성이나 공익성 등의 면책사유를 피고, 즉 언론사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언론의 항변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 진실성이나 상당성을 증명해도 보도의 동기가 더 문제라고 보면 유죄가 된다.

 

두 나라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공직자에 대한 법리다. 미국은 공직자에게 실제의 악의라는 별도의 기준을 적용해 위법성을 판단하는 반면 한국은 공인과 사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동일한 기준으로 위법성을 판단한다. 다만 위법성을 조각하거나 이익형량을 따질 때에 공인과 사인의 차등을 둘 뿐이다. 이마저도 판사의 재량에 달려있다.

 

공직자나 공적 사안에 대한 보도를 어디까지 보호할 것이냐는 쟁점

 

미국의 공직자 명예훼손 및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기본정신은 정부와 공직자에 대한 언론의 자유는 특별히 더 보장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런 원칙에 따라 미국에서 공직자나 공적 사안에 대한 언론보도는 사실상 헌법적 특권을 누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공직자 보도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언론에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공직자들은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이미 과도할 정도로 보장받고 있다는 점을 유념하자고 말하고 싶다. 공인을 불문하고 형사소송이 가능하고, 모욕죄 및 사실적시 명예훼손 등 표현을 제한하는 규제들이 넘쳐난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고위 공직자들이 정치적 문제를 고소와 고발을 통해 형사사건화 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차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징벌적 손배제의 쟁점은 배상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언론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보통의 시민이나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구제하기 위해 배상금을 현실화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를 위해서라도 공직자나 권력집단이 이 제도를 악용할 소지를 예방하고, 차단하는 제도적 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하려는 목적이 공직자의 권리를 강화하려는 게 아니라면 갈등은 좀 더 쉽게 풀릴 수 있다. 공직자나 공적 사안에 대한 보도를 예외로 하거나, 실제의 악의처럼 공직자에게는 심사 기준을 달리하여 더 높은 책임을 요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배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본질이 아니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자. 공직자의 명예보호인가, 시민의 언론피해구제인가? 과연 누구를 위한 징벌적 배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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